[시조 중서공 휘 지수(之壽)] 家乘으로

우리나라 조씨성의 관향이 35본이나 되지만,
특히 한양은 더욱 성문이다. 공은 즉 거룩하신 시조이시다.
공의 휘는 지수요.
관은 고려 중엽에 조순대부 첨의중서사(朝順大夫僉議中書事)에 이르렀으며,
묘는 함경도 영흥면 은곡동에 모셨다고 족보에 전해지고 있으나 실전하였으니 명호라,
통탄하도다!
왕년에 자손들이 위선하는 정성으로누차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주민에게 물으면
조씨선산이 이 산중에 있었다고 하나 어느 곳인지 몰라 뜻을 이루지 못하여
후손들이 백세의 한을 풀지 못하였다.
이에 조선 고종 광무 5년(1901)에 예손 준식(양경공파)등이 도모하기를
조상의 묘소를 잃으면 설단하고 향사해서 그 은혜심을 베풀 수 있다하고,
고종 광무5년에 설단입비하여 그 정성을 표하여 왔다.
그러나, 남북이 분단되어 구릉을 첨망하고 단하에 분향하는 것마저 할 수 없게 되였다.
그리하여 이남 제손들이 울읍한지 어언 50여년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종회에서 분단이후 두번째 족보를 발간하려 함에 첨종이 협의하여
이곳 이남에도 따로이 설단하여 향화하는 것이 도리라 하고,
2004년 4월 17일 후손 광주전남종친회장 일형(양절공파)등이
충남 홍성군 홍북면 대인리 매산 제각골에 설단입비하여 제향을 받들게 되였다.
시조 중서공께서 독자를 두시니 총관공 휘 휘이며,
후손이 30여만명으로 명문 거족으로 성장하였다. 世系로


[2세 총관공 휘 휘(暉)] 家乘으로

총관공(摠管公) 조휘(趙暉)께서는 본래 한양부(漢陽府) 사람으로 후에
용진현(龍津縣)에 옮겨 살았다.
자(字)는 양운(揚雲), 1258년(고종45) 동북변지방(東北邊地方:철령이북)을
몽고에 할지(割地)하게 되어
몽고가 화주(和州:영흥) 쌍성(雙城) 총관부(摠管府)를 설치하자
총관(摠管)이 된후 대대로 습작(襲爵)되어,
1356년(공민왕 5)그 지방이 고려에 다시 수복(收復)될 때까지 계속했다.
시조 중서공 휘지수의 독자로 태어나시어,
고려 고종 45년(1258) 원(몽고)의 쌍성총관부 초대 쌍성총관에 제수되셨다.
이후 공의 증손자까지 四世 99년간 총관을 세습하여
화주(和州)이북 12개성을 통치하셨으며,
공민왕조(恭愍王朝)에 1356년(공민왕 5) 양렬공께서 안우(安祐) 이방실(李邦實)등과
더불어 도원수(都元帥) 四道 도통사(都統使)로서 이 지방을 회복케 하여 지대한 공훈(功勳)을
세웠다.
1273년 돌아가셨으며, 묘는 함남 덕원군 북성면 신안리이다.
묘소앞에 사계화가 있어 우리 가문의 상징이 되고있다.
1926년 가선대부 부경(종2품 벼슬로 현재 차관급임)을 지낸 정윤(참판공파)공이
쌍성각을 창건하였다.
독자를 두시니 부원수공 휘 양기이다. 世系로


[3세 부원수공 휘 양기(良琪)] 家乘으로

부원수공의 2자이며, 고려 공민왕 5년(1356년) 쌍성총관부를 수복할 때 협찬하시여
예빈경을 제수받고, 개성에 저택을 하사받으셨다.
고려 원종 14년(1273)부공인 총관공의 별세로 인하여 13세의 나이로 제2대 총관이 되셨다.
충렬왕 7년(1281) 5월에 원세조(쿠빌라이)가 합포(현재 마산)에서
고려.원 연합군의 선단을 편성하여
일본을 정벌할 때 원의 장군 흔도타구를 도원수로,고려의 김방경을 원수로,
쌍성총관이신 공을 부원수로 삼았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때마침 불어온 큰 태풍으로 도원수 흔도타구는 패하고 돌아왔으나,
공이 이끄는 선단은 무사히 이기고 돌아왔으므로 원세조가 이를 크게 기특히 여겨
그 공을 찬양하고 상으로 금포(비단옷)와 玉帶(옥대)를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그대가 아직 미혼이니 이것을 입고 돌아가 어진 배필을 얻어 훌륭한 자손을 낳아
대대로 나의 자손에게 정성을 다하기를 그대가 지금 내게 하듯이 하라"고 하였다.
그때 공의 나이 21세였다.
그러나,일설에는 합단군이 철령을 넘어온것을 공이 포로로 잡아 바쳤으므로
이것을 내렸다고도 한다.
금포는 훼손되어 없어지고 옥대는 현재 대종가에서 보관하고있다.
공의 묘소는 함남 영흥 덕흥면 용천리이다. 世系로


[4세 용천부원군 휘 림] 家乘으로
부원수공의 장자로 제 3대 쌍성총관에 세습되었으며, 용천부원군에 봉하였다.
아들 총관공 휘 소생을 두셨으나, 후손은 무전이다.


[4세 용성부원군 휘 돈(暾)] 家乘으로

공민왕 8년에는 서경(지금 평양)에 쳐들어온 홍건족을 격퇴하셨다.
1360년 공부상서, 1362년 해주목사, 1363년 예의판서에 오르고,
홍건족을 격퇴한데 대하여 1등공신에 책록되셨다.
장조카인 총관공 소생(小生)의 후손이 전해지지 않아 한양조씨는 공의 후손으로
인벽, 인경, 인규,인옥(仁壁,仁瓊,仁珪,仁沃)만으로 이어져 내려오고있다.
1308(충렬왕 34)∼1380(우왕 6). 초명은 우(祐).부원수공의 2자이며,
고려 공민왕 5년(1356)쌍성총관부를 수복할때 협찬하시어 예빈경을 제수받고,
개성에 저택을 하사받으셨다.
공민왕 8년에는 서경(현재 평양)에 쳐들어온 홍건적을 격퇴하셨다.
1360년 공부상서,1362년 해주목사,1363년 예의판서에 오르고,홍건적을 격퇴한데 대하여
1등공신에 책록되셨다.
우왕 원년(1375)삼중대광 용성군(정1품)에 오르셨다.
공의 사후에 조정에서 부원군에 추봉하고 문하좌시중을 추증하였다. 묘는 함남 안변군 신모면 어유지이다.
장조카인 총관공 휘 소생의 후손이 전해지지 않아,
한양조씨는 공의 후손만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世系로


[5세 총관공 휘 소생(小生)] 家乘으로

용진현(龍津縣)에 살았다.
부공인 용천부원군 제3대 총관공의 별세로 제4대 쌍성총관(雙城摠管)에 세습되었으나,
공민왕 5년(1356) 고려에서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는데 항거하다가 패하여
만주로 피신하였으며, 자손기록이 없다.


[5세 양렬공 휘 인벽(仁璧)] 家乘으로

?~1393(태조 2)
호(號)우계
고려·조선의 문신. 판도판서(版圖判書) 돈(暾)의 아들. 용진(龍津:덕원) 출신.
1356년(공민왕 5) 아버지와 함께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유인우(柳仁雨)를 도와 쌍성(雙城)의 회복에 공을 세워
호군(護軍)이 되었고, 1363년(공민왕12) 김용(金鏞) 토벌에 공을 세워 2등 공신이 되었다.
1372년(공민왕21) 판사(判事)로서 가주(家州)의 난동자들이 관리를 죽이자
이들을 토벌하고 이 해 만호(萬戶)가 되어
함주(咸州)·북청(北靑)에서 복병(伏兵)으로 왜구(倭寇)를 격파,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랐다.
1375년(우왕 1) 밀직 부사(密直副使)로 동북면 원수(東北面元帥)로 나가 왜구를 토벌,
1377년 신주(信州)·옹진(甕津)·문화(文化)의 왜구를 쳤으나 전과가 없었다.
이듬해 판밀직(判密直)으로서 화포(火砲)를 사용하여 수군(水軍)을 훈련,
이듬해 강릉도 원수(江陵道元帥),
1380년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왜구를 격퇴, 1383년(우왕 9)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서
동북면 도체찰사(東北面都體察使)가 되고,
1388년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에 가담하고 삼사 좌사(三司左使)를
거쳐 1389년(공양왕 1) 판의덕부사(判懿德府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회군의 공으로 2등공신에 책록되고,
앞서 환조(桓祖)의 딸 정화공주(貞和公主)와 결혼하여
1393년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양렬(襄烈).
용성부원군의 장자로 호는 우계 또는 해월정이다.
고려조에 용원부원군에 봉해지고 조선조에 양렬공의 시호를 받으셨다.
고려 공민왕(1356)쌍성을 수복하여 호군이 되시고,
공민 임인년에 이방실과 함께 서경(평양)회복에 대공을 세웠으며,
다음해에 김용을 토벌하여 2등공신이 되고, 임자년에 판사로서 가주난동을 진압하여
만호가되어 함주 북청의 왜적을 격퇴하고, 봉익대부에 승진,
1375년(우왕)에 밀직부사로서 동북면 원수로,
정사년에 신주,옹진,문화 등에 누차에 걸쳐 왜구를토벌하였다.
다음해에 판밀직으로 화포로 수군을 훈련,다음해에 강릉도 도원수겸 부윤,
다음해에 상원수로 왜적을 격퇴,
계해년에 문하찬성사로 동북면 체찰사,을축년에 4도 도지휘사,무진년에 삼사좌사,
다음해에 판의덕부사로 승진하여
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삼중대광(정1품)용성부원군삼사좌사겸판소부시사를 역임하셨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태조 이성계가 처남인데도 불구하고 양양으로 은퇴하여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켜 유림이 충현사,
동명서원(강원 양양읍 조산리 소재)을 세워 모시고
조선왕조에서는 증좌정승 시호 양렬공을 하사하였다.
묘는 개풍군 흥교면 사곳리이다.
배우자는 하동정씨와 정화공주(환조의 따님, 조선 태조의 누이) 두분이시다.
世系로


[5세 검찬성공 휘 인경(仁瓊)] 家乘으로

고려에 벼슬하여 고위 관직인 검찬성에 이르렀다. 무후(아들이 없음)이다.


[5세 검한성공 휘 인규(仁珪)] 家乘으로

고려에 벼슬하여 검한성윤(현재 서울시장)에 이르렀으며,아들 부사공 휘 순을 두셨다.


[5세 충정공 휘 인옥(仁沃)] 家乘으로

고려때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시 대공을세워 회군공신 1등에 책록되시고,
조선개국에 협찬하시어 개국1등공신에 책록되시고,
벼슬은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한산부원군에 봉하였다.
전제개혁과 유도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사후에 시호 충정공을 하사하고,
부조묘를 명하였으며, 태조묘정에 배향하였다.
묘는 경기 양주군 장흥면 삼상리에 예장하였고,
부조묘 사우는 충북음성군 금왕읍 하유촌리이다.
* 참고 : 시조부터 4세 및 5세 양렬공 묘소가 북에 있는 관계로
남에서는 충정공 묘소가 제일 위대의 묘소임.
시제는 매년 음력 10월 1일이며, 부조묘 제향은 음력 9월 14일이다.


[6세 양절공 휘 온(溫)] 家乘으로

1347(충목왕 3)∼1417(태종 1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양렬공의 장자로 6세 대종손이시다.
고려때 이조판서를 역임하셨다.
조선개국에 협찬하시어 개국공신 2등에 평양윤(평양시장)에오르고,
평안도 수주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시고, 군인을 훈련시키고,
호적을 정리하여 나라의 터전을 충실히 하는데 힘을 쏟으셨다.
1차 왕자의 난때 정사공신 2등에 책록, 2차왕자의 난때 4등에 책록 되셨고,
벼슬은 병조판서 등을 역임 하시고
벼슬이 보국숭록대부(정1품)의정부 좌찬성 겸 판 내자시사에 이르렀고,
한천부원군에 봉하였다.청렴검소하기로 유명하다. 돌아가신후 조정에서 시호 양절공,
부조묘를 명받았다.
묘는 파주시 교하면 오도리 장명산 남록이며 묘 계하에
둘째아드님 한풍군 휘 완의 묘소가 계장되어 있다.
참고:묘소 시제 음력 10월 2일
부조묘 제향:음력 5월 19일.충남 홍성군 홍북면 대인리 노은동 매산 世系로


[6세 양경공 휘 연(涓)] 家乘으로

1374(공민왕 23)∼1429(세종 11).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초명은 경(卿), 자는 여정(汝靜).
아버지는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 인벽(仁璧)이며,
어머니는 정화공주(貞和公主:환조의 큰딸)이다.
음보로 산원(散員)이 되고, 1386년(우왕 12)문과에 급제하였다.
1392년(공양왕 4) 공조총랑(工曹摠郎)을 거쳐,
이해 조선이 건국되자 천우위대장군(千牛衛大將軍)으로서
왕의 의친(懿親)인 까닭에 별운검(別雲劒)이 되어
좌우에서 왕을 호위하였다.
1396년(태조 5) 과의상장군(果毅上將軍)에 승진되고,
이어 중추원우승지·동지삼군부사(同知三軍府事)를 역임하였으며,
1400년(정종 2)제2차왕자의 난에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4등이 되고
한평군(漢平君)에 봉하여졌다.
1402년(태종 2) 우군총제(右軍摠制)를 거쳐 1404년 도총제를 역임한 뒤
무과회시에 감교관(監校官)이 되어 33인의 무신을 뽑았다.
1407년 겸좌군총제가 된 뒤
이듬해 풍해도관찰사의 왜선 40여척이 나타났다는 보고에 따라
안산·부평의 조전절제사로 파견되었으나
조선의 표류선임이 확인된 뒤늦은 보고에 의하여 돌아왔다.
이해 상호군·겸좌군도총제·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409년 병서강토총제(兵書講討摠制)가 되고,
이듬해 길주도도안무찰리사(吉州道都安撫察理使)로 나가
변방을 침범하는 모련위 야인의 수장 파아손(巴兒孫)·올량합(兀良哈)·착화(著和) 등을
죽인 뒤에 그들의 근거지까지 쳐부수고 남녀포로 수십인을 포획하여 돌아왔다.
1412년 중군도총제·겸판사복시사 등을 거쳐 1413년 공조판서·지의정부사를 역임하였다.
1416년 판좌군부사가 되고,
이듬해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1419년(세종 1)세종이 즉위하자
동지총제가 되었다.
1420년 찬성사가 되었으며,
1426년 우의정에 올랐으나, 이해 김도련(金道鍊)으로부터 노비를 뇌물로 받은 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황해도 수안에 부처되었다가 곧 방면되었다. 성품이 온순하였으며, 문신이면서 야인정벌에 무공을 떨쳤다.
시호는 양경(良敬)공이며,부조묘를 명하였고,묘는 파주시 덕은3리이다.
*참고 : 묘소 시제는 10월 3일이며, 부조묘 제향은 10월 10일이다.


[6세 안정공 휘 후(候)] 家乘으로

조선조에 벼슬하여 지돈령부사(정2품)에 이르렀으며,시호는 안정공이다.

[6세 가천재공 휘 사(師)] 家乘으로

호는 가천재이며, 조선태조의 친생질이므로 예에 따라 첨지중추원사에 제수되었으나,
큰형인 양절공은 개국정사좌명공신,
작은형은 좌명공신으로 모두 세상에 이름 났으므로
공은 부공인 양렬공을 따라서 조정에서 여러번 불러도 일어나지 않아
마침내 여말삼은과 더불어 그 뜻을 같이 하였으니, 그총효는 백세의 사표가 될것이다.
공이 일찌기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포은 정몽주선생의 묘소가 가까운 곳에 묻어
지하에서나마 따라놀 수 있게하라"는 유훈에 따라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모셨고 동명서원에 배향되었다.

[6세 부사공 휘 순]

검한성공의 독자로 태어나 부사를 지내셨다.


[6세 절효공 휘 뢰]

충정공의 장자이시며,호는 백탄,
조선때 무과에 급제, 충청도,경상도절제사를 지낸후 공조참판,
경기감사,평안감사,판한성부사,지돈령부사,예조판서를 지내셨다.
시호는 절효공이며,묘소는 양주 장흥 부공묘소의 우백호이다.


[6세 참의공 휘 재]

충정공의 2자이며, 벼슬은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묘는 충주시 가흥면 서태산이다.


[6세 사평공 휘 갱]
충정공의 3자이며,세종조에 벼슬하여 장례원 사평에 올랐다.
단종이 화를 입을때 동생인 판사공 휘 관과 종손인 휘 섬과 함께
남헤에 유배되었다가 풀렸다
묘는 함평군 대동면 유교리이다.


[6세 판사공 휘 관(貫)]

충정공의 4자로 사평 갱의 아우이다.
세종시 문과에 급제하시고, 중훈대부 삼척부사겸 수군첨절제사,
삼척진병마사를 역임하시고
관이 숭록대부(종1품)중추부 판사에 이르렀다.
단종이 화를 입을때 중형인 사평공 휘 갱과 종손인 휘 섬과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풀렸다.
1431년(세종 13) 종마관압사(種馬管押使)로 명나라에 다녀오셨고,
중추원 부사로 계실때 사은부사로 연경에 다녀오심.
묘는 양주 장흥 삼상리 재궁동이다.


[7세 첨지공 휘 의] 家乘으로

양절공의 장자로 벼슬이 첨지중추원사(정3품)에 이르렀으나,
후손이 없어 동생인 한풍군 휘 완이 종통을 받아 한양조씨의 주손(종손)이 되었다
묘는 실전하였다.


[7세 한풍군 휘 琓(완)] 家乘으로

1372(공민왕 21)년 임자년에 양절공의 2자로 출생.
조선 세종 2년에 가선대부(종2품)판홍주목사, 우군총제,세종12년 경주부윤으로 계시면서
공법의 세법이 좋지 않음을 보시고 호조에 건의하여 시정하였고,
잠시 우군총제에 전임되셨다가
그해 10월에 다시 선위사총제로 함길도(함경도)에 파견되셨다.
세종 22년 자헌대부(정2품)지중추원사에 승진되시고, 익년(1441) 8월 15일 돌아가셨다
백씨 첨지공 휘의께서 무후로 조졸함으로 공이 태종 17년 종통을 이어받아
한양조씨의 주손(종손)이 되셨고,
세조3년 공신의 적장손중 품계가 2품이상에 이른자는 '군'에 봉하고,
작호를 물려받도록 하라는 왕명에 따라
한풍군에 추봉하였다.
묘는 파주 교하 오도리 부공인 양절공 묘계하 쌍분이다.
함종어씨 어섭갑의 詩[계립부윤 망호정에 제한다]가 전한다. 世系로


[7세 도제공 휘 하] 家乘으로

함길도의 변방을 잘지키라는 어명(특명)을 받아 도제별장겸 진무어사에 임명되셨다
묘는 함남 영흥 정평 귀림사이다.
남북이 분단되어 묘소에 갈 수 없어서
후손들이 당진군 면천면 사계 2리에 설단하여 제향을 받들고 있다.


[7세 참판공 휘 흥]

벼슬이 통정대부(정3품)선공감정에 이르렀으며.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셨다
묘는 양주군 회천면 덕계리이다.


[7세 고사공 휘 육(育)] 家乘으로

양절공의 5자이시며, 문정공 정암 휘 광조의 증조할아버지이시다.
어모장군(정3품)의영고사를 지내셨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되셨다
묘는 용인시 기흥읍 신갈리이다.


[7세 총제공 휘 모(慕)]

양경공의 장자,지돈령부사를 역임하시고, 도총제사를 지내셨다.
묘는 실전하여 파주 월롱면 덕은리 부공인 양경공묘 좌백호에 설단하여
세사를 봉사하고 있다.


[7세 돈령공 휘 자(慈)]

지돈령부사를 지내셨고
묘는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 장미산이다.


[7세 공안공 휘 혜(惠)]

자는 제부(濟父), 호는 시재(施齋)이다, 조선태조 3년 갑술생, 양경공의 3자,
타고나신 성품과 기량과 도량이 너그러우시고 넓으셨으며,
1439년(세종 21) 전라도병마도절제사를 지냈다.
1442년 호조참판으로 있을 때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64년에 판중추원사의 직을 받았다.
숭정대부(종1품) 판중추부사에 이르셨다.
세조10년 갑신년에 돌아가셨다. 시호는 공안공(恭安公)이다. 시집(詩集)이 있다.
배우자는 정경부인 순흥안씨(順興安氏)로 판중추원사 정숙공 순(純)이다.
묘소를 서울 방학동에 모셨으나 중간에 몇백년 실전(묘소를 잃어버림)하여
성묘와 시향을 모시지 못했었다.
그러나 공의 19대손인 태희(台熙)가 1956년 병신년에 공안공의 묘소를 찾아
3개파가 회합을 갖고 협력하여 성금을 모아 길일을 택하여 개사토하였다.
이후 1966년 대전시 흑석동의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여 세사를 봉행하고 있다.
6자 4녀를 두시니
장자 지당(之唐)은 첨지중추부사요,
2자 지은(之殷)은 별좌 어모장군이요,
3자 지하(之夏)는 목사요,
4자 지한(之漢)은 대호군이요,
5자 지주(之周)는 형조참의요,
6자 지원(之元)은 사직공이다.


[7세 병참공 휘 련(憐)]

세종 10년(1428년) 인수부 판관,병조참의,첨지돈령부사,
1453년(단종원년)가선대부 동지돈령부사,중추원부사,
1455년 세조원년시 좌익원종 2등공신에 책록,병조참판에 이르렀다
配 는 정부인 인천이씨.
묘는 벽제 목암동 국사봉 아래이다. 묘사일은 매년 10월 3일이다.


[7세 현령공 휘 맹발]

가천재공의 장자.금화현령을 지내셨다 묘는 용인시 포곡면 마성리이다.


[7세 파서공 휘 순생(順生)]

절효공의 장자.호는 파서(坡西).문과 급제,호당에 천거,이조참의에 이르렀다.
1439년(세종 21) 평안도경차관(平安道敬差官)을 지냈으며,
계유정난때 안평대군과 가까워 피화 사사되었다.
후에 복관되시고, 이조참판, 홍문관 제학에 추증되셨으며,
영월 충신단,공주 동학사 숙모전 등에 봉안되셨다.


[8세 지추공 휘 (증)] 家乘으로

대종손. 세종 31년 예안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었고,
세조2년 보공장군으로 계실때 개국 정사 좌명 공신이신 양절공의 적장손으로
세조가 주재한 5공신 회맹제에 참석,
성종 2년 어모장군때 양절공의 적장손으로 성종이 주재한 8공신 회맹제에 참석하셨다.
가선대부 대호군을 역임하시고,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묘는 홍성 홍북 대인리 노은동 매산이다. 世系로


[8세 사예공 휘 충손(衷孫)]

자는 성지(性之),세종24년 대과에 급제, 성균사예. 계유정난때 피화되셨으나,
태비의 친족이라 사형을 면하셨다.
성종2년 관직이 회복되었고, 예조판서,홍문관 제학에 추증되고,
영월 충신단에 배향되셨다.
육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백찬(李伯撰)의 딸이다.
묘는 용인 수지읍 상현리이다.


[8세 인촌공 휘 명(銘)]

자는 경부(警夫), 호는 인촌(仁村).
세종때 병조정랑. 계유정난때 부친과 금산에 유배후 목천에 이배되었다가
배소에서 돌아가셨다.
후에 복관되고,도승지에 추증되셨다.
태조배향공신이며 개국공신인 인옥(仁沃)의 증손으로,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뇌(뇌)의 손자이고, 이조참의 순생(順生)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이다.
목천 장보사,충렬사에 배향되셨다.


[8세 형의공 휘 지주(之周)]

1448(세종 30)∼1492(성종 23). 아버지는 판중추원사 혜(惠)의 5자이며,
어머니는 의정부찬성 안순(安純)의 딸이다.
1451년(문종 1) 문음(門蔭)으로 인수부승(仁壽府丞)에 서용된 뒤 주부를 거쳐,
1455년(세조 1)직장으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3등에 책록되었다.
곧 승훈랑(承訓郎)에 승진하면서 사헌부감찰에 발탁되었고,
이어 칠참도찰방(七站道察訪)·신계현령·장단군수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이어 1467년경 연안부사에 제수되고, 그 임기중에 선정으로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었다.
1471년(성종 2) 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로 나갔다가
1474년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으로 입조하였다.
이듬해 양주목사로 나갔으며, 개만(箇滿)과 함께 형조참의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곧 인척인 이조판서 강희맹(姜希孟)으로 인하여
부당하게 제수되었다는 지탄을 받고 여주목사에 개수(改授)되었다.
이어 1482년 성주목사가 되고,
1486년 강화부사를 거쳐 1491년 안동대도호부사로 파견되었다가
임지에서 서거하셨다.
30여년에 걸쳐 1현·1군·3부·4주의 목민관을 역임하였는데 선정으로 명성을 얻었다.


[9세 승지공 휘 윤선允瑄] 家乘으로

대종손. 지추공 휘증의 장자로 공조정랑,면천군수,충훈부 경력,도호부사에 이르렀다.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셨으며,부공인 지추공 산소 아래에 단소가 있다.

[9세 면천공 휘 윤상(允)] 家乘으로

벼슬은 중훈대부로 면천군수를 지내셨으며,
배는 숙인 죽산 박씨이며, 그 부는 군수 홍문, 조는 현감 첨()이다.
증조는 전객령 중의, 외조는 전주최씨 군수 자성이다.
묘는 홍성군 홍북면 노은동 중리에 북북서을 등지고 합장했다. 비석이 있다.


[9세 어모공 휘 수창]

사산공 휘 류의 장자. 자는 구수,벼슬은 어모장군 부호군에 이르렀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시고, 묘는 고양시 향동이다.


[9세 판관공 휘 흔손]

형의공 휘 지주(之周)의 2자. 통훈대부 행 진주목판관을 지내셨다.
묘는 대전시 흑석동에 모셔져 있다.


[9세 문절공 휘 원기(元紀)]

1457(세조 3)∼1533(중종 28). 사예공 휘 충손(衷孫)의 아드님, 정암 휘 광조의 숙부.
자는 이지(理之). 호는 돈후재(敦厚齋). 조선 중종때의 재상.
어려서 기상이 안중하였다. 연산 2년(1496)문과에 급제. 전적, 수찬으로 계실때
연산군이 사초를 보려하자, 이를 거부하다가 파면되었고,
연산 6년(1500)에 변민이 해랑도로 도망하자 부장으로 그들을 붙잡아 데려왔으며,
봉안시 첨정이 되셨다가 사초를 거부한일로 연루되어 횡성에 유배되었다.
중종이 즉의하자 사성, 경원부사, 대사간, 좌부승지, 형조판서, 의정부 좌참찬,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충효절검을 좋아하여 재상을 지내면서도 집은 비바람을 가릴정도요
음식은 소금과 나물에 그쳤다.
청백리에 오르셨고 한양조씨 최초의 족보인 "갑신단권보"를 창간하셨다.
시호는 문절공이시며,
묘는 용인이다.


[10세 판결사공 휘 방정]

형조정랑에 천거.
1506년 문과에 급제, 호조정랑, 군자감정, 예빈시 부정, 장흥부사, 사도시 부정, 상의원정,
우통례원, 좌통례원, 절충장군을 역임하시고, 장례원 판결사에 이르렀다.
묘는 안성시 원곡면 월곡리이다.


[10세 예참공 휘 방언(邦彦)]

1469(예종 1)∼1532(중종 2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윤지.
중종1년(1506) 별시 문과 급제.
이듬해 정언이 되고 헌납 ,전한, 장낙원정, 사간으로 참찬관을 겸하고,
대사간으로 승진, 호조참의를 지낸뒤 강원도 관찰사, 동부승지, 형조참의, 부제학,
좌승지, 대사헌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 예조참판, 공조참판이되고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오셨다.
1498년(연산군 4)생원으로서 선릉(宣陵:성종의 능)옆에 사찰을 짓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하였다.
아버지는 수창(壽昌)이며, 어머니는 박흔(朴昕)의 딸이다.
묘는 부공인 어모공 휘 수창의묘 구역에 있다.


[10세 문정공 정암 휘 광조(光祖)] 자세히..

1482(성종 13)∼1519(중종 14). 조선 중기의 문신. 감찰 증 참판 휘 원강의 아드님.
성종 13년 한성에서 출생.연산 4년 무오 한훤당 김굉필 선생문하에서 수업하셨다.
1510년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시고,
1515년 문과에 급제, 성균관, 사헌부, 사련원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셨다.
1516-1519년 사이에 호조, 예조, 공조의 좌랑, 홍문관 수찬, 부제학, 동부승지를 거쳐
사헌부 대사헌(종 2품.현재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을 합한것과 같음)에 등용되셨다.
여씨 향약을 도입하셨고, 소격서를 혁파하여 미신타파에 앞장서고,
현량과를 창설하여 인재 발탁에 힘쓰고,정국공신(중종 반정공신)을 개정하여
공신 및 보수정객들의 부정부패를 근절하기를 건의하여 모두 채택 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간신인 남곤, 심정 등의 무고로 전남 화순군 능주에 유배되셨다가 기묘년에 사사되었다.
인종 원년에 복관되고 선조때에 영의정에 추증되셨고, 1569년 시호 문정공을 하사하였다.
1570년 능주 죽수서원을 비롯하여 이후 수백년간 선생을 봉사하는 전국 수십처의 서원이 설립되었으며,
광해 2년(1610) 국가에서 예관을 가묘(사당)에 보내서 치제하였으며,
그해에 문묘(공자의 사당으로 문묘 배향은 가문의 최고 영예임)에 배향되었다.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등 4현을 포함하여 "동방5현"이라 칭한다.
선생은 우리나라 도학 및 실천유학의 시조로 추앙하고 있으며,
일반 유학자와 같이 다만 문장이나 이론만이 아닌 정치, 경제, 교화에 있어서
요민 군주의 사상을 실제로 구현하는데 힘썼다.
묘는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이며 묘소 좌측편에 심곡서원이있다.


[10세 휘 광좌(廣佐)]

1483(성종 14)∼1521(중종 16). 일명 광좌(光佐). 자는 계량(季良).
도총제 모(慕)의 증손으로, 군수 훈(勳)의 아들이다.
1507년(중종 2)성균관유생으로서
박경(朴耕)·김공저(金公著)의 옥사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함.


[10세 예참공 휘 철정(哲楨)]

예참공 휘 철정(哲楨). 판관공 휘 흔손의 2자. 사과예참의를 지내셨다.


[11세 돈암공 휘 보]

참판공 휘 흥의 현손.자는 덕중, 돈암은 자호(스스로 붙인 별칭)임.
한훤당 김굉필 문하. 현량과 선발. 벼슬은 상의원 별제임.
기묘사화에 공의 4형제가 모두 구속됨.
동생인 교리공은 유배당했고, 공과 두아우는 파직되었음.
이후 산수를 유람하면서 생을 마치심.
묘는 양주 참판공 묘역 구내임.


[11세 돈계공 휘 필]

참판공 휘 흥의 현손임.
자는 언국.여러 사람들이 공을 존경하여 이름을 부르지 않고 "돈계선생" 이라 칭함.
효렴으로 예빈시 참봉, 사직랑,교위를 지내셨고, 사마에 합격하셨으며,
현량과에 선발됨.
기묘년에 공의 4형제가 모두 구속수감되어 파직된후 두문불출하셨다.


[11세 한유군 휘 덕원德源)]

1522(중종 17)∼1582(선조 15). 자는 경혼(景混). 1553년(명종 8) 문과에 급제,
예빈시 판관을 역임하시고 전한에 이르렀다.
선조시에 한유군에 봉하였다. 아버지는 여산군수 헌(憲)이며,
어머니는 성균학록 오윤(吳潤)의 딸이다.


[11세 좌찬성공 휘 변]

자는 호연(浩然), 호는 금재(琴齋). 5대 사손. 좌찬성(종1품)에 추증되셨다.
아버지는 부사 광언(光彦)이며, 어머니는 유제(柳悌)의 딸이다.
학자이며 대사헌을 지낸 광조(光祖)가 바로 그의 족숙(族叔)이다.


[11세 백기당장군 휘 웅]

무과 별시 급제 선전관을 역임하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띄워 의병 500명을 모집하여 충주 태자산 아래 주둔하고
왜적을 무수히 죽이며 저지하고 물리치셨다.
이후, 충주목사에 승진, 적과 맞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총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왜적에 사로잡힘.
적이 공의 팔과 발을 잘랐으나, 이에 굴하지 않으시고 왜적을 꾸짖었음.
끝내 사지를 찢기는 죽음을 당하셨다.
조정에서는 가선대부 병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를 추증하고,
충신각(충주시 앙성면 능암리)을 세웠으며,
근래에 기적비를 충주 탄금대에 세웠다(용갓비.거북기단)
묘는 충주 앙성면 조천리이다.


[12세 모촌공 휘 광정(光庭)]

1552(명종 7)∼1638(인조 16).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는 응순(應順). 예조참판 방언(邦彦)의 손자로, 부사맹(副司猛) 관(琯)의 아들이다.
1582년(선조 15)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당쟁이 심한 것을 보고 황해도 연안에 내려가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군의 진로를 막았다.
그 공으로 군자감 참봉이 되시고,
난이 끝난후 여러번 관직에 천거되셨으나 사양하셨다.
묘는 연안이며 현충사에 배향되셨다.


[12세 가선공 휘 광필(光弼)]

예참공 휘 철정(哲楨)의 2자이신 휘 허의 장자.
고창고부의 가선대부를 지내셨다.
묘는 전북 고창군 공음면 칠암리 산 16번지(연동부락) 동쪽하단부에 위치하다.


[12세 한흥군 휘 공근(公瑾)]

1547(명종 2)∼1629(인조 7). 자는 회보(懷甫), 호는 소옹(梳翁).
천성이 효에 지극하여 8세에 어머니 유씨가 돌아가심에 애통하기가 어른과 같았고,
부친의 병이 심하자
자기 다리의 살을 베어 대접했으나 돌아가시니 3일동안 물 한모금 마시지 않으셨다.
1592년(선조 25)임진왜란때 사직재랑으로 신주를 모셔 위성공신으로 한흥군에 봉하였다.
옥천군수,형조정랑을 역임하시고 광해군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병을 칭하시고 사직,
양근에 돌아가 계시다가 인조 5년(1627)동지중추부사가 되셨다.
아버지는 전한 덕원(德源)이며, 어머니는 현감 유이(柳이)의 딸이다.
묘는 경기 양평읍 도곡리이며,부조묘를 명하였다.


[13세 통정공 휘 유한(維韓)]

자는 지국 선조18년(1585) 진사시에 합격,
동 22년 문과 급제(공의 두아우도 문과에 급제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임란때 왕을 호위하여 의주행재소까지 모셨다.
예문관 검열, 승정원 주서, 세자시강원 설서, 사서, 경기도사, 병조좌랑,
호조좌랑, 정랑, 강원도사, 대동찰방, 춘추관 기주관, 함종현령, 경성판관, 인천현감,
광해 3년 선조를 호위한 공적으로 원종 1등훈으로 통정대주에 특진,
절충장군 부호군을 역임하셨다.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추증되셨다.
묘는 고양시 향동 어모공 휘 수창 묘역에 있다.


[13세 통정공 휘 국령(國嶺)]

가선공 휘 광필(光弼)의 장자. 가선예무장을 지내셨다.
묘는 전북 고창군 공음면 칠암리 산 19번지(연동부락) 산의 정상부(철탑상)에 위치하다.


[13세 현곡공 휘 위한(緯韓)]

1567(명종 22)∼1649(인조 27). 자는 지세(持世). 호는 현곡(玄谷). 선조 34년(1601) 사마시에 합격,
광해 1년 문과에 급제. 인조반정후 사성, 장령, 집의, 양양부사를 역임하시고, 호당에 선출되고
이괄의 난, 정묘호란에 참전하셨다. 양양부사로 재임시 동명서원을 창건하셨다.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양정(揚庭)의 아들이다. 유한(維韓)의 아우이며 찬한(纘韓)의 형이다.


[13세 현주공 휘 찬한(纘韓)]

1572(선조 5)∼1631(인조 9). 자는 선술(善述), 호는 현주(玄洲).
양정(揚庭)의 아들이며, 위한(緯韓)의 아우이다.
1601년(선조 34)생원시에 합격, 160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균학유로 조랑, 간원을 지내시고,
영암, 영주군수가 되어 삼도 토포사로서 호령방면에 출몰하던 도적을 소탕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예조참의, 동부승지에 이름.
광해군의 난정을 피해 상주목사로 나가셨다가 인조반정후에 형조참의, 예조참의, 선산부사를 역임하심.
천자가 탁월하시고 문.무의 재능을 겸하셨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서예에 이름이 드높았다.
청구영언에 시 2수가 있으며 현주집(문집)이있다. 묘는 파주시이다.


[13세 문간공 휘 경]

자는 일장, 호는 용주. 광해 4년(1612)사마에 합격. 인조반정후 유일로 천거되어 고창현감,
경산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다음해에 형조좌랑으로서 목천현감이 되셨으나 1년만에 그만두심.
인조4년 친시에 장원급제하시고, 인조21년 일본통신부사를 마치고 돌아와 일본기행을 쓰셨으며,
형조참의, 대사간, 대제학, 형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시고 현종2년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한양조씨 두번째 족보인 신묘삼권보를 발간하셨다. 시호는 문간공,
포천 용연서원에 배향되심.


[13세 백담공 휘 우신(又新)]

자는 여읍(汝揖), 호는 백담(白潭). 상(相)의 아들이다. 정경세(鄭經世)·이현영(李顯英)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 5)진사시에 합격하고,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 는 상소를 올리고 은거하셨다.
인조22년 추천을 받아 참봉이 되시고 1648년 문과에 급제, 벼슬은 정자를 지내셨다.
상주 지강서원에 배향되셨다.


[13세 휘 빈(贇)]

1587(선조 2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계언(季彦), 호는 은성(隱星). 공근(公瑾)의 아들이다.
1624년(인조 2)식년문과에 갑과로 등제, 1628년 지평에 서임되었다.
이어 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을 역임하였다.


[13세 매오공 휘 경진(景璡)] 家乘으로

조선 말기의 학자.
<매오유고 (梅塢遺稿)> 서·발이 없어 편찬연대를 알 수 없다. 권 상에 시·부, 권 하에 의·논·표·책,
부록에 여자첩(與子帖) 등이 실려 있다. 시는 서정적인 내용이 많은데 그 가운데 <차일부재득(此日不再得)>은
시간이 다시 오지 않으므로 후회 없이 학문에 힘써야 한다는 내용의 시이다.
책 가운데 <비적지책(備賊之策)>은 고래로 여러 차례의 외침이 있었음을 상기하면서
강병(强兵)의 필요성과 그 대책을 논한 것이며, <여자첩>은 전란과 백성들의 생활상을 그린 것이다.
2권 1책. 필사본. 世系로


[14세 통정공 휘 영찬(英燦)]

통정공 휘 국령(國嶺)의 장자.
묘는 전북 고창군 공음면 칠암리 산 19번지(연동부락)


[14세 한계군 휘 종선]

14세 대종손이시다.
생원으로 아드님인 15세 대종손 한원군 휘 명한이 귀하게 되어(가선대부 호조참판) 증직법에 해당 되어
참판에 추증되셨다.
조정에서 개국 정사 좌명 공신이신 양절공 휘 온의 적장손(종손)이라서 한계군에 봉하였다


[14세 문목공 휘 극선(克善)] 家乘으로

1595(선조 28)∼1658(효종 9).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유제(有諸), 호는 야곡(冶谷). 경진(景璡)의 아들이며,
박지계(朴知誡)· 조익(趙翼)의 문인이다.
23년(인조 1) 학행으로 추천되어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시고, 호조정랑, 면천군수를 지냈다.
뒤에 순창군수(淳昌郡守)·형조정랑·익위사사어(翊衛司司禦)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48년 온양군수(溫陽郡守)가 되었고 효종 때 통훈대부 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내셨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시고 시호는 문목공이다.
효행으로 이름이 높아 조정에서 정려가 내렸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숙종이 책을 하사하였다.
문장에 능하여 야곡집과 야곡삼관기가 전해진다. 6세 양절공 묘비를 새로 세웠으며,
신창의 도산서원.덕산의 회암서원에 배향되셨고,
묘는 예산 봉산 시동리이며, 신도비와 정려비각 어서제가 있다.
성리학과 예설에 밝은 학자로서 효행으로 이름이 났다.
뒤에 이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신창(新昌)의 도산서원(道山書院)과 덕산(德山)의 회암서원(晦庵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야곡집(10권)》 《야곡삼관기(冶谷三官記)》 등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
봉산면 시동리에 조극선 효자문이 있다. 조극선은 항상 부모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는 효자였다.
부친이 출타하여 집에 올 시간이 되면 항상 지금 비석이 서 있는 곳에 와서 기다렸다가
부친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어느날 부친이 덕산 현감과 함께 늦은 밤까지 담소를 하다가 비가 내리자 너무 늦었고 비도 오니 자고갈 것을
권하였으나 그의 부친은 자식이 밖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기 때문에 가기를 강행하자
현감이 확인해 보자고 따라 나섰다.
현감이 쫓아가 보니 조극선이 그 늦은 밤까지 냇가에서 비를 맞으며 부친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감복한 현감이 조정에 이 사실을 아뢰니, 효자정려 문을 세워주게 된 것이다. 世系로


[14세 계와공 휘 비(備)]

1616(광해군 8)∼1659(효종 10). 자는 사구(士求), 호는 계와(桂窩). 좌승지 찬한(纘韓)의 아들이며,
이식(李植)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인조 13년(1635) 진사시에 합격. 헌릉참봉, 세자익위사 시직,청하현감을 지내셨다.
효종2년(1651) 문과 급제. 춘추관 수찬, 사서, 정언, 직강, 녹사, 교리, 임실현감, 성균사예,
제용감정 겸 서학교수 들을 역임하셨다.
문장으로 이름났으며,
묘는 고양시 향동 어모공 휘 수창 산소묘역이다. 문집 계외집이 전한다.


[14세 한릉군 휘 복한]

휘 연의 8세손이다. 한릉군에 봉하였다.


[14세 녹문공 휘 위봉(威鳳)]

1621(광해군 13)∼1675(숙종 1).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문(鹿門). 우참찬 경(絅)의 아들이다.
1642년(인조 20)사마시에 합격하시고, 현종 1년 문과에 급제. 정언을 거쳐 응교에 이르렀다.
청빈과 진퇴에 의리가 있으셨고, 정치에 청간한 한편,
백성을 사랑하며 조정에서 항상 정의를 주장하여 권신의 뜻에 거슬려 벼슬을 버리시고 문학으로 소일하셨다.
글씨에 능하심


[14세 송천공 휘 위명(威明)]

1640(인조 18)∼1685(숙종 11). 자는 회여(晦汝), 호는 송천(松泉). 우의정 연(涓)의 후손으로, 구(구)의 아들이다.
현종 9년(1668) 문과급제. 작은아버지 경(絅)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문예에 뛰어났고 필법이 절묘하였다.
숙종이 즉위하자 국자직강으로 시책을 쓰셨으며 승지를 거쳐 충청감사가 되시어 선정을 베푸셨다.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14세 휘 위수(渭수)]

1630(인조 8)∼1699(숙종 25). 자는 상보(尙甫). 광조(光祖)의 5대손으로, 군수 송년(松年)의 아들이다.
남원부사·수원토포사(水原討捕使)·수원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남원부사 시절 “수령의 직분은 관가의 일을 보살피는 것인데 승급한다고 하여
번잡한 상전(賞典)을 베푸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직언하기도 하였다.


[14세 휘 사기]

1617(광해군 9)∼1694(숙종 20).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경지(敬止). 빈(贇)의 아들이다.
1648년(인조 26)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예문관검열에 피임되고, 이어 사간원정언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


[15세 한원군 휘 명한]

대종손. 공이 대종손으로 계실때 양절공의 외손인 영의정 김육 공이 조정에 천거하여 양절공 부조묘를 명하였다.
공의 벼슬은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이르렀으며 양절공의 종손이라 조정에서 한원군을 봉하였다.


[15세 휘 창한(昌漢)] 家乘으로

자는 만종(萬宗), 호는 노포(老圃), 본은 한양. 문목공(文穆公)극선(克善)의 아들, 효로 추천되어 의령 현감 역임.
선정(善政)을 베풀어 의령 땅에 거사비(去思碑)가 섰다. 묘는 봉산면 시동리에 있다. 世系로


[15세 동산공 휘 성한(晟漢)] 家乘으로

1628(인조 6)∼1686(숙종 12). 자는 본초(本初), 호는 동산(東山)·쌍괴당(雙槐堂). 호조정랑 극선(克善)의 아들이다.
문목공의 2자로 태어났으나, 8세 대종손인 지추공 휘 증의 2자인 예안공파 후손이 무후하여
예안공파로 양자를 가셨다.
동몽교관이 되시고, 한성참군,의금부 도사,연천현감을 역임.정사를 간명.엄격하게 하고 폐습을 일소하시다가
간신의 무고로 파직되셨다.
그후 조정에서 대관직에 천거했으나,이를 거절. 홍주(홍성) 노은동 동산촌에 은거하시면서
집앞에 두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었으므로 호를 동산 또는 쌍괴당이라 하였다.
청양 정산면 이산사에 봉안되셨고, 저서로는 동산유고가 있다.

[15세 한은군 휘 정익]

한릉군 휘 복한의 장자. 조정에서 한은군을 봉하였다


[15세 한원군 휘 유안]

휘 인옥의 10세 사손. 조정에서 한원군에 봉하였다.


[16세 산서공 휘 경남(慶男)]

1570(선조 3)∼1641(인조 19). 조선 중기의 무인. 공안공 -형의공파 판관공 휘 흔손의 장자 군수공 휘 세정의 6대손 .
자는 선술(善述), 호는 산서(山西)·산서병옹(山西病翁)·산서처사·주몽당주인(晝夢堂主人). 남원출생.
아버지는 사직 벽(璧)이며, 어머니는 남원양씨이다.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나 사대부 의식이 투철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재(文才)가 뛰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조모의 손에 양육되었으나
기상이 활달하였다. 10세에 유인옥(柳仁沃)에게 입문하여 제술(製述)로
남을 놀라게 하였다. 13세에는 난리를 예견하여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8세에는 조헌(趙憲)의 문하로 들어가 의리와 도덕을 터득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는 군문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뜻대로 하지 못하고,
29세에 전라도병마절도사 이광악(李光岳)막하에서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금산·함양 등지의 왜군을 무찔렀다.
39세에는 향시(鄕試) 양장(兩場)에,
45세에는 삼장(三場)에 합격하고서도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난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 54세에 겨우 진사에 등과하였으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방장산(方丈山) 용추동(龍湫洞)에 별업(別業)을 짓고
산서병옹이라 자처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삼학사(三學士)의 심양(瀋陽)순절소식에 충의를 읊기도 하였다.
사후 주포서원(周浦書院)에 향사되었다.
1582년에서 1639년까지 58년간의 사적을 일기체로 기술한 《난중잡록 亂中雜錄》이 있다.
《속잡록 續雜錄》과 더불어 의병활동의 생생한 기술과
명·청과의 외교활동의 객관적 기술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전북 남원시 광한루원- 춘향전의 저자로 학계(설선경교수)에의해 알려졌으며,
묘는 남원시 이백면 초동리의 의충사에 배향되셨다.


[16세 한흥군 휘 구]

한원군 휘 유안의 아드님. 조정에서 한흥군을 봉하였다


[16세 옥천공 휘 덕린(德린)]

1658(효종 9)∼1737(영조 13). 자는 택인(宅仁), 호는 옥천(玉川). 군(군)의 아들이다.
1677년(숙종 3)사마시에 합격한 뒤 1691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교리,사간,필선 등을 역임하시고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경상도 호소사가 되셨으며, 난이 평정된 후 동부승지에 올랐다.
1736년 서원의 남설을 반대하는 상소를 하셨다가 노론의 탄핵으로 제주에 귀양가시던중 강진에서 돌아가셨다.
저서로는 옥천집이있다


[16세 휘 덕순(德純)]

1652(효종 3)∼1693(숙종 19). 자는 현부(顯夫)·현보(顯甫), 호는 호옹(壺翁). 아버지는 군(군)이며,
어머니는 유세장(柳世張)의 딸이다. 1679년(숙종 5)생원시에 합격하고, 1690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17세 휘 경희(敬熙)] 家乘으로

자는 숙경(肅敬), 호는 송정(松亭), 본 한양, 효로 표창받고, 참봉에 등용되고, 지평에 추증되다.


[21세 문헌공 휘 성교(性敎)]

1818(순조 18)∼1876(고종 13). 자는 성유(聖惟). 호는 소정, 형관(亨觀)의 아들로 형만(亨晩)에게 입양되었다.
1859년(철종 10)증광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고종시에 예조판서, 대제학을 지내셨으며,
2세 부원수공의 옥대를 왕명으로 보수하셨다.
시호는 문헌공이다


[21세 휘 정교(鼎敎)] 家乘으로

자는 성삼(聖三), 호는 양심재(養心齋), 본 한양, 최수(最洙)의 아들, 효로 정려가 봉산면 시동리에 섰다.

[22세 공조판서공 휘 종필(鐘弼)]

문헌공 휘 성교(性敎)의 아드님. 자는 은상(殷相). 1867년(고종 4)진사가 되고, 1874(고종 11년) 문과에 급제.
1874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대사성,이조참의,한성우윤,한성좌윤,형조참판 등을 역임하시고
정헌대부 공조판서,함경도.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셨다.


[24세 유석 조병옥]

독립운동가 휘 인원의 아드님. 호는 유석.콜롬비아대학 철학박사.
연희전문에서 5년간 교편을 잡은후 민족운동에 투신하셨다.
1927년 신간회의 조직에 참여 총무부장이 되고, 1929년 광주학생사건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어
한용운 선사와 함께 피검, 1년간 옥고를 겪었다.
뒤에 도산 안창호 선생이 지도한 흥사단에 관련하여 재차 투옥 도합 5년간의 영어(감옥) 생활을 하셨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김성수선생, 장덕수선생 등과 한민당을 조직, 반공 반탁을 내걸고 민주정권 수립에 전력하셨다.
미군정기간 중에 경무부장을,1953년 내무부장관,1953년 민의원 당선,1955년 민주당 조직,
1956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셨다.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재당선,
1960년 민주당 공천 대통령 후보로 입후보하여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와 대결하시던중 신병 치료차 도미하여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병사하셔서 국민들 전체가 통곡하였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단장을 추서하였고,
저서로는 "나의 회고록","민주주의와 나" 가 있으며 묘는 도봉산 기슭이다.
아들은 준형과 윤형(만한당 총재,국회 부의장)은 작고 하였고, 순형(현 국회의원)이 있다.
본 대종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을 지내시고(유석 박사가 조직한 대종회는 현재 이어져 내려오고있다),
1959년 한양조씨대보(기해대보)를 발간하셨다.


[27세 조지훈 (趙芝熏)]

1920∼1968. 시인. 국문학자. 본명은 동탁(東卓). 호는 지훈. 경상북도 영양(英陽)출신.
아버지는 헌영(憲泳)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4남매 중 둘째아들이며, 어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움.
고풍의상,승무,봉황수 등이 정지용에 의해 "문장"지에 추천되어 등단. 혜화전문 문과 졸업
박두진,박목월과 함께 청록집을 발간하여 청록파 시인이라 부름.
고려대 문과대 교수,민족문화연구소 초대소장.
공의 전아한 고전적 취미는 한국인의 역사적 문화적 인식을 일깨우는 뜻이 있으며,
민족의 문화적 동질성을 환기시킴으로써 일제치하의 민족의 굴욕을 극복하려함.
따라서,공의 시에서는 저항적 요소가 보이고 있으며, 그러한 정신적 시세와 연결되고있다.
"지조론"을 주장하셨고, 주요작품으로는 승무,완화삼,기다림,산상의 노래 등이 있다. 1968년 졸하셨다
시인이면서도 ‘지조론(志操論)’을 쓸 만큼 ‘지조’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던 선비였다.
‘지조론’은 그의 집안 가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지훈의 고향인 경북 영양군 일월산 자락의
주실(舟室) 마을은 한양 조씨들이 400년 가깝게 터를 잡고 살아온 집성촌이다.
인근지역에서는 보통 ‘주실 조씨’들로 불린다.
주실 조씨들은 영남의 식자층 사이에서 ‘검남(劍南)’ 집안으로 불리는 강골 집안이기도 하다.
‘칼 같은 남인 집안’의 가풍 속에서 조지훈은 태어나고 성장하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인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 200년은 경상도 남인(南人)들의 수난시대였다.
노론(老論)들에 밀려 벼슬다운 벼슬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춥고 배고픈 상황에서 머리를 숙이고 가랑이 밑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자존심을 지킬 것인가.
‘검남’이 택한 노선은 후자였다.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가훈이 바로 삼불차(三不借)였던 것이다. ‘세 가지를 빌리지 않는다’.
첫째는 재불차(財不借).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재물을 빌리지 않는다.
재물을 빌리지 않기 위한 최후의 마지노선이 종가 앞에 위치한 50마지기의 논이다.
수백년 동안 이 50마지기는 누구도 함부로 팔거나 저당 잡힐 수 없는 불가침의 땅이었다.
둘째는 문불차(文不借).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
선비 집안이 글을 못해서 다른 집안으로 글을 빌리러 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주실 조씨들은 어렸을 때부터 글공부에 매진하였다.
비록 벼슬은 못해도 학문이 높으면 선비로 대접받을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셋째는 인불차(人不借). 사람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은 ‘양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조선시대 명문가에서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들여 대를 잇는 것이 관례였는데,
양자를 들이려면 상대방 집에 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간청을 해야만 하였다.
양자 달라고 머리를 조아리지 않겠다는 말이다.
흥미롭게도 조지훈의 집안에서는 370년 동안 양자를 들이지 않고 혈손으로 대를 이어왔다.
이 삼불차가 ‘지조론’의 뿌리였다.
영남지역의 보수성은 ‘삼불차’와 같은 남인가풍과도 관련 있다.


[조우 (趙 佑)]

1484(성종 1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성중(誠中). 정랑 영석(永錫)의 아들이다.
1507년(중종 2)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추천을 받아 좌랑을 지낸 뒤 1519년 현량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교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해에 기묘사 ...


[조사수 (趙士秀)]

1502(연산군 8)∼1558(명종 1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계임(季任), 호는 송강(松岡).
수견(壽堅)의 손자로, 방좌(邦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형(申炯)의 딸이다.
1531년(중종 26)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정언·교리?...


[조징 (趙 澄)]

1511(중종 6)∼1574(선조 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형숙(泂叔), 호는 송강(松江). 면(勉)의 손자로,
광필(廣弼)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함여훈(咸汝勳)의 딸이다.
1537년(중종 32)유학으로 왕으로부터 직부회시의 명을 받았다.


[조확 (趙 擴)]

1535(중종 30)∼1575(선조8). 조선 중기의 문신. 좌참찬 언수(彦秀)의 아들이다.
1569년(선조 2) 진사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


[조응문 (趙應文)]

1549(명종 4)∼1611(광해군 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일관(一貫), 호는 송호(松湖) 또는 무민(無悶).
아버지는 연안부사 첨지 징(澄)이며, 어머니는 영화정(永花正) 이정주(李呈珠)의 딸이다.
1594년(선조 27)부사과로서 정 ...


[조수익 (趙守翼)]

1565(명종 20)∼1602(선조 3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시보(時保). 홍문관응교 정기(廷機)의 아들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자립하여,
1590년(선조 2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성...


[조중려 (趙重呂)]

1603(선조 36)∼1650(효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경(重卿), 호는 휴천(休川). 도정 간(幹)의 아들이다.
송영구(宋英구耉)· 임숙영(任叔英)의 문인으로, 1630년(인조 8)진사시에 합격하여 선릉참봉(宣陵參奉)·조지서별 ...


[조종저 (趙宗著)]

1631(인조 9)∼1690(숙종 16).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취숙(聚叔), 호는 간재(艮齋)·남악(南岳).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중려(重呂)이며, 어머니는 지중추부사 신경진(申景珍)의 딸이다.
1660년(현종 1) 성균 유생(儒生)으로 성혼(成渾)·이이(李珥)를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라는 등의 상소문을 찬(撰)했고, 1669년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낸 후 167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가 사서(司書)·전적(典籍)·헌납(獻納)을 역임했다. 1675년(숙종 1) 복상 문제(服喪問題)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 서인(西人)이 실각하자 면직, 뒤에 수찬(修撰)·지평(持平)·사성(司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이 등장 할 때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고, 이어 사성·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내고 회양 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 1699년 이이·성혼이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되자 병을 핑계로 등청(登廳)하지 않아 파직당했다. 학문에 뛰어나고 특히 역사에 밝았으며 산수(算數)·천문(天文)·의약(醫藥)에 이르기까지 통달했다.
현종(顯宗)13년(1672년), 별시(別試) 을과1(乙科1)


[조진희]

1678(숙종 4)∼1747(영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천우(天佑). 종저(宗著)의 손자로, 의징(儀徵)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유명재(柳命才)의 딸이다.
1712년(숙종 39)생원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717년 주서가 되어 ?...


[조석회 (趙錫晦)]

1727(영조 3)∼1802(순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이성(而晟), 호는 일봉(一峰). 아버지는 규양(葵陽)이며,
어머니는 풍산김씨(豊山金氏)로 달룡(達龍)의 딸이다.
1773년(영조 49)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고, 1781년(정 ...


[조수삼 (趙秀三)]

1762(영조 38)∼1849(헌종 15). 조선 후기의 여항시인(閭巷詩人). 초명은 경유(景유). 자는 지원(芝園)·자익(子翼),
호는 추재(秋齋)·경원(經원).
가선대부 한성부좌윤 겸 오위도총부부총관(漢城府左尹兼五衛都摠府副摠管)에 ...


[조제화 (趙濟華)]

1816(순조 16)∼?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계당(季棠). 석기(錫耆)의 아들이다.
1869년(고종 6)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70년 수찬, 1877년 이조참의, 1878년 승지, 1884년 대사성,
1890년 이조참판과 대사헌을 거쳐 판?...


[조명교 (趙命敎)]

1829(순조 29)∼?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성수(聖受). 형면(亨勉)의 아들이다. 음직으로 출사하여
1866년(고종 3)비안현감으로 재직중 관찰사에 의하여 치적이 보고되어 승서(陞敍)되었고,
1875년 강릉부사를 지낼 때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사고(史庫)보전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
1876년 경과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883년 우부승지로서 신정희(申正熙)·임응준(任應準) 등의 처벌 철회를 바라는 원의계(院議啓)를
승정원에서 올리기도 하였다.
1891년 성균관대사성을 지내고 1900년 책인조성(冊印造成)때에는 독금책인관(讀金冊印官)을 맡아 가자(加資)되었다.
이듬해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어 칙임관 4등이 주어졌고 태의원경(太醫院卿)을 역임하였다.
1905년에는 예식원장례경(禮式院掌禮卿)으로 칙임관 2등이 주어졌다.


[조광조]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 한양
호 : 정암(靜庵)
별칭 : 자 효직(孝直), 시호 문정(文正)
활동분야 : 정치
주요저서 : 《정암집》
그는 개국공신 온의 현손으로 당대의 이름난 도덕가요 성리학자였다.
이이는 김굉필·조광조·정여창·이언적 등 4인을 ‘동방사현’이라 일컬을 정도였다.
한양조씨의 인물은 총관공파에서 많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도 판도판서 인벽의 아들 4형제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중종 때 형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오른 원기, 중추부판사를 지낸 혜,
인조 때 대제학·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일본기행》을 지은 경,
현종·숙종 때 명필로 이름 있던 위명 등이 그들이다.
그 밖에 헌종 때 문장과 시의 천재로 알려진 수삼과 그의 손자로 초상화에 뛰어난 화가 중묵이 있다.
본관 한양.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고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安)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전적·감찰·정언·수찬·교리·전한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것은 국왕 교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사림파 등용, 훈구정치(勳舊政治) 개혁을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이었다.
국왕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이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에 힘써 노력하여 정체(政體)를
세우고 교화를 행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앞 시기의 사화(士禍)와 같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것을 역설하였다.
성리학 이념의 전파를 위해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김굉필·정여창(鄭汝昌)에
대한 관직 추증을 시행하였으며, 나아가 뒤의 두 사람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여 전국에 반포하게 한 것은 사림파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1518년에 천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급제자는 주로 사림파 인물들이었다.
훈구정치를 극복하려는 정책들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추진되었다.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 때에 좌의정을 지냈다는 이유로
반정(反正) 후에 폐위된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반정공신들의 자의적인 조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도교 신앙의 제사를 집행하는 관서로서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몰아
혁파한 것도 사상적인 문제인 동시에 훈구파 체제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었다.
급기야 1519년에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부당한 녹훈자(錄勳者)가 있음을 비판하여
결국 105명의 공신 중 2등공신 이하 76명에 이르는 인원의 훈작(勳爵)을 삭제하였다.
이러한 정책 수행은 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 등에 의해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는 공격을 받았으며,
벌레가 ‘조광조가 왕이 될 것(走肖爲王)’이라는 문구를 파먹은 나뭇잎이 임금에게 바쳐지기도 하였다.
결국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지지를 업은 훈구파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킴에 따라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러나 후일 사림파의 승리에 따라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 왕도(王道)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으며,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는 진술로
압축한 바와 같이 도학정치의 구현인 지치라고 표현하였다.
동시에 그러한 이념은 사마시에 제출한 답안인 〈춘부(春賦)〉에 나타나듯이 자연질서 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따뜻하고 강렬한 확신이 기초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점은 후대 사림들에게 경계해야 할 점으로 평가되었다.
훈구파의 반격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한때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이념과 정책은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조선 후기까지의 모든 사족(士族)은 그가 정몽주·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도통(道統)의 정맥(正脈)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이라는 점에 정파를 초월하여 합의하고
추앙하였다.
그것은 학문의 전수 관계로 인한 것만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한
노력에 대한 경의였다.
문집에 《정암집》이 있다. 간략히..